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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족보에 대하여(대림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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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3주간 월요일 (창세49:2, 8-10/시편 72:1-4, 18-19/마태 1:1-17)

 

왕과 족보에 대하여

 

오늘 독서와 시편은 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 이야말로 참다운 왕이시고, 이 분은 아브라함부터 다윗에 걸쳐 내려오는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도대체 왕이란 무엇인가’하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국민이 선거로 뽑는 공화정 체제 하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왕이란 그저 가끔씩 듣는 남의 나라 의전행사 뉴스에 불과하고, 우리 삶에 그리 와 닿지 않는 역사적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王이란 한자의 유래에 대해서 대체로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士이고, 다른 하나는 五입니다. 士란 선비란 뜻으로 쓰이고 있는데, 원래는 독립된 임무를 갖고 있는 자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王은 士위에 一을 그은 모양으로서 독립된 임무를 갖고 있는 자들 중에서 가장 최고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한 나라를 맡고 있는 자야말로 누구에게도 간섭 받거나 지시받지 않는 그야말로 최고의 독립된 지위이고 이런 사람을 王이라고 합니다. 다른 의미는 五에서 유래하는 것인데, 五는 일부터 십까지 중에 가운데에 있는 숫자이고, 모든 숫자의 중간이자, 중심의 기능을 합니다. 五에서 한 획을 뺀 王은 이런 의미에서 모든 것의 중심이자, 구심적 역할을 하는 영어로 coordinator(조정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독서와 시편에서 묘사하는 왕도 이러한 두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49장은 야곱이 열두지파의 시조인 열 두 아들에게 마지막 축복을 빌어주는 대목인데, 특히 유다 왕국의 시조인 유다에게 모든 형제들의 후손이 그 앞에 엎드릴 거라면서 장차 왕이 나올 거라고 복을 빌어 줍니다.

그러면 이처럼 하느님이 점지하신 최고 통치자는 어떠해야 합니까? 오늘 시편 72편은 왕의 역할에 대해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백성에게 평화와 정의를 안겨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올바른 통치력과 정직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특별히 약자들이 억울하게 당하지 않도록 공정한 판결을 하여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동양에서 말하는 모든 것의 중심이자 구심이며 조화를 이루게 하는 왕의 역할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왕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오랜 역사를 거쳐 만들어 집니다. 족보는 이것을 증명하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그 족보는 100% 순수하며 선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천사의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섭리는 곡절 많은 인간 역사를 관통하여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님 족보도 바로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어머니 마리아를 제외하고, 4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다말, 라합, 룻,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이방인이거나 혹은 남편이 이방인입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우리의 일반적인 도덕관념으론 받아들이기 힘든 기이한 인연으로 자식을 낳았다는 점입니다. 다말과 라합은 가나안 원주민인데 다말은 자식없이 남편과 사별한 다음, 기상천외하게도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하였고, 이스라엘민족이 예리고성을 점령할 때 도움을 준 라합은 예리고의 소문난 창녀였습니다. 룻은 보아즈를 유혹하여 결혼하였고, 바세바는 자기를 범하고 자기 남편을 전사케 한 어떤 의미에선 원수 같은 사람인 다윗왕과 결혼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이들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우리의 윤리관점으로 볼 때 불륜을 저지른 이들을 성서는 왜 족보에 기록했을까요? 여기에 대해 유대교 율법학자들은 다른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즉, 유다 가문이 끊어지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느님이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가계를 이어가게 허락하신 거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에 대하여 유다인 그리스도교 신자 공동체의 일원인 마태오 복음저자는 그러한 관점을 받아들이면서, 한발 더 나아가 처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을 이러한 하느님의 불가사의한 섭리의 극치로 이해한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여러분은 무엇을 갈망하시고 기다리십니까? 한없이 선하고 완전한 선과 평화가 이루어지길 바라십니까? 그런데 어쩌면 그러한 희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선 때론 거칠고, 그래서 어느 땐 모든 것이 끊겨버릴지도 모르는 별의별 우여곡절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마치 오늘 족보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그러한 난관의 한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은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섭리하시면서 진정한 희망을 함께 만들어 가실 거라는 믿음입니다. 우리 자신도, 우리 가문도, 우리 교회도, 그리고 우리민족도 이러한 믿음과 희망으로 묵묵히 걸어간다면 진정한 평화, 아기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임재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