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예수님에 대하여) 2. 예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1)

(예수님에 대하여) 2. 예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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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1)

 

루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대략 서른 살쯤 세상에 나오셨다고 한다(3:23). 그렇지만 이를 두고 딱 서른에 맞추어 공생활을 시작했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유대인에게 서른 살은 색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시대의 평균 수명은 대략 40세 정도였다고 한다. 정확한 인구조사에 근거한 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건강상태와 높은 유아 사망률을 감안할 때 이런 계산이 나온다. 그러니 이스라엘에서 서른 살이라 하면 이제는 어느 정도 성숙한 인격을 갖춰 세상을 아는 나이로 보면 좋다. 예수님이 정확히 서른 살이 아니라 서른 살 쯤부터 복음 전파를 시작했다고 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요즘의 철없는 서른 살과는 질이 다른 나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나와서 처음 활동을 시작했을 때 주변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정확히 알 도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불렀는지 그 호칭들을 두루 살펴보면 예수님이 주변에 준 인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얼마나 많은 이름을 갖고 있었을까?

얼추 따져보아도 열개는 훌쩍 넘어간다. 나열해 보면, 나자렛 예수, 선하신 분, 랍보니, 환생한 요한, 예언자, 엘리야, 다윗의 후손, 메시아, 놀라운 분, 귀신두목, 먹보에 술꾼, 죄인과 세리의 친구….. 이 중 몇몇은 딱히 이름이라기보다 별명에 가깝지만 아무튼 주변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받은 일차적인 인상을 담고 있기에 우리에겐 소중한 이름들이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전도 활동 시작부터 파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바로 놀라운 기적을 행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와 병을 고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물위를 걷거나 풍랑을 잠재우거나 돼지 떼를 몰살시키거나 하룻밤 사이에 무화과나무가 말라죽은 꼴을 보았다. 그렇게 예수는 경이로운 능력을 가진 분이었다. 이런 예수를 두고 군중은 놀라운 분이라고 부르는데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마르 1:27, 2:12 등등). 그런데 아무리 놀라운 일을 행해도 고깝지 않게 보는 시선도 한쪽에 꼭 있기 마련이다.

예수가 귀신 들린 자를 자유롭게 해주자 몇몇 율사(율법학자)들이 저 정도 일을 해내려면 결국 귀신두목의 힘을 빌리거나 귀신두목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귀신들이 쩔쩔매면서 무릎을 꿇을 정도면 그 대장을 만나야 그리 되지 않겠는가! 그러자 예수님은 귀신 집안에 내분이 일어나면 그 집 자체가 망조에 들 것이라는 비유로 자신의 능력이 귀신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가 실제로 기적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원래 적들의 눈이 더 매서운 법이다. 예수에게 적대적인 율사들까지도 그분의 능력을 인정했기에 귀신두목운운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마르 3:20-29).

다음으로 재미있는 호칭은 먹보에 술꾼이다.(루가 7:34) 정확히 말해 이는 예수 자신에게 붙여진 별명이라기보다 제자들에게 붙여진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이 먹보에 술꾼이 된 것은 다 스승의 영향이다. 어느 날인가 사람들이 와서 예수에게 왜 오늘 단식을 하지 않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유대인은 월요일과 목요일을 단식하는 날로 지켰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은 자유자재로 먹고 마시는 게 아닌가. 당연히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러자 예수는 하느님의 잔치 날에 어떻게 단식을 할 수 있는지 되묻는다(마르 2:18-20).

사실 음식과 관련된 예수의 명성은 이스라엘에 널리 퍼져 있었다. 율법에서는 꼭 손을 씻은 후 식사를 하라고 했는데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더러운 손으로 먹지 않나(마르 7:1-3), 전도 중에 방문한 집에서 음식물을 내오면 절대 사양치 말고 맘껏 먹으라고 하지 않나(루가 10:7-8), 그것도 모자라 수천 명을 배불리 먹이기까지 한다(마르 6:42) 그 같이 거침없이 먹고 마시는 예수의 행동 뒤에는 자신감이 들어 있었다. 바로 무엇이든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게 사람을 더럽히는 게 아니라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16)이다. 그런 자신감은 예수의 식사 장소를 제한하지 않았다.

원래 의로운 유대인들은 세리나 창녀 등 죄인의 집에서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는 죄인의 집이 부정한 장소라서가 아니라 죄인들이 내오는 음식물이 정결치 않기 때문이다(레위 11장 참조). 그런데 예수는 세리의 집이든 세리장의 집이든 죄인의 집이든 가리지 않고 찾아가 식사를 했다. 음식에 대한 구약성서의 금기를 당연히 깨면서 말이다. 그러니 어찌 예수를 세리와 죄인의 다정한 친구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수의 식탁은 평등의 밥상이었다. 여기에는 누구나 초대받을 수 있었는데, 예수를 의인으로 보아 존경했던 종교지도자들 맘에는 영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평등은 상류층과 하류층의 펑균치에서 이루어지는 수준 맞춤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들, 곧 세리와 죄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낮은 곳으로의 평등이었다. 그러니 세리와 죄인을 무시하는 건방진 자들은 예수의 밥상을 물리고 자신들 갈 바로 가고야 말 것이다. ‘저것들은 율법도 모르는 무식한 놈들이며 예수는 고작 세리와 죄인의 친구일 뿐이라는 말을 남기고.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