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박태식의 함께 사는 이야기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영화평]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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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박태식 신부(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사는세상’ 원장)

일본 영화감독 중 몇몇은 절제된 감정으로 사물을 표현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굿 & 바이2008년>의 타키타 요지로나 <4월 이야기1998년>의 이와이 슌지 등이 떠오르는데 <걸어도 걸어도2009년>를 연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도 이 분야에서 상당한 내공을 보여준다. 특히, <걸어도 걸어도>에서 자식을 먼저 보낸 어머니의 이야기는 도대체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슬픔이 억제되어 있었다. 원래 일본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잘 내비치지 않는다고 하지만 자식과 사별한 어머니까지도 어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히로카즈 감독의 최신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そして父になる, 극영화, 일본, 2013년, 121분) 역시 대단한 절제력을 보여주는 영화다. 그렇게 숨겨진 메시지가 얼마나 강렬했던지 지난해인 2013년에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까지 받았다. 본디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은 대상의 성격과 확실하게 구분되는 작품성을 갖고 있기에 언제나 눈여겨 볼만한 가치가 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소재도 매우 독특한데,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문제가 되었던 산부인과에서 아기가 바뀐 사건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병원 측 직원은 아기가 바뀌는 경우 제 자리를 찾아주는 게 상례라고 한다. 진실이 밝혀진 이상 그저 방치해 둘 수 없다는 뜻이겠다. 거기에 더하여 법적 조치까지 취해져 피해 부모는 재판을 통해 상당액의 배상금을 지급받는데, 당연히 병원과 배상금 액수로 다툼을 벌인다. 돈 문제가 끼어들면서 묘한 방향으로 사태가 진행하리라는 암시를 주는 대목이다. 이것들은 모두 뒤바뀐 아들들인 케이타(니노미야 케이타)와 류세이 사건의 상황으로 받쳐주는 전제들이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 히로카즈 감독이 던져주려는 메시지는 정의 실현 같은 사회적 차원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오히려 가족과 관련해 보다 보편적인 이야기를 끌어내려 한다.

이야기는 먼저 케이타의 부모인 료타(후쿠야마 마사하루)와 미도리(오노 마치코), 그리고 류세이의 부모인 유다이(릴리 프랭크)와 유카리(마키 요코)를 중심으로 움직여나간다. 그러다가 료타가 친엄마 대신 의붓어머니의 손에서 자란 전력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아기가 뒤바뀐 사건에 책임이 있는 간호사가 후처로 들어가 전처의 아이들을 키우는 처지였다는 사실이 부각된다. 여기서 이야기가 천천히 케이타와 류세이에게 넘어가더니 마침내 ‘어떻게 아버지가 되는지’에 대한 감독의 속내가 드러난다. 말하자면 료타가 아버지로서 역할을 깨닫는 순간 가족에 대해 감독이 내리는 새로운 정의定義가 밝혀지는 셈이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가족이라 하면 료타의 아버지가 단언했듯이 우선 혈연관계가 떠오른다. 혈연은 가족의 중심 개념이자 가족 전통의 근간이기도 하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는 누군가를 처음 대면할 때 흔히 본관本貫이 어디이며 중시조中始祖는 누구이고 항렬行列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곤 했다. 그 때 만일 대답을 얼버무린다거나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해대면 다시는 상종 못 할 인사人士로 취급했다. 이런 말을 하려니 격세지감이 절로 느껴진다. 아무튼 우리나라뿐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든 가족은 불변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혈연 중심의 가족 개념에 담겨있는 생각은 분명하다. ‘나’는 과거의 종합이라는 것인데, 이 논리를 따라가면 나의 개인적인 의지와 달리 ‘나’라는 존재가 결정된다. 과거가 현재의 ‘나’ 뿐 아니라 미래의 ‘나’까지 결정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와 성찰의 가능성을 배제한 생각일 뿐이다. 프로이드 비판에 앞장섰던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는 과거를 불변不變의 심리 장치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가변可變의 도구로 간주했다. 우리에게 장차 주어지게 될 미래가 오히려 과거의 의미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과거를 사용한다. 이를테면, 쓰라린 과거사가 실패자의 합리화 도구로 쓰이기도 하지만 종종 약진의 논리로 탈바꿈된다. 자신의 과거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미래를 망칠 수도, 구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비견할 수 있는 영화로 <가족의 탄생>(김태용 감독, 한국, 극영화, 2006년, 113분)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다섯 명의 여성이다. 평생 수동적인 삶을 살면서 남동생의 망나니짓을 남매의 정으로 수용하는 미라(문소리), 술집에서 이 남자 저 남자 상대하며 잔뼈가 굵은 무신(고두심), 유부남이든 홀아비든 자신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을 밀어내지 못하는 매지(김혜옥), 어머니 매지의 우유부단함에 질려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보려는 선경(공효진), 그리고 천성적으로 남을 도울 수밖에 없는(?) 채현(정유미). 모두가 이 영화의 당당한 주인공이다.

그들 여성들은 각자 할 말 많은 인생을 살아간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자칫 산만할 수 있는 이야기 흐름을 이리저리 잘 묶어 적절하게 배치함으로써 영화의 탄력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야기에 탄력을 유지시키면서도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무엇일까? 바로 예로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 여성들의 정情이다.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자신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고, 한참을 같이 살다보면 비록 죽은 남편의 전 부인이 남긴 아이라도 거두어들이는 한국의 정 말이다. 그런 ‘정’은 도저히 가족 구성이 불가능할 것 같은 조건에서도 끈끈한 연대감을 생산해낸다. ‘가족’이라고 하면 무엇보다 먼저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이루어져야 한다.

히로카즈 감독의 말에 따르면 과거 전통의 다른 표현인 ‘피’가 가족의 진가眞價를 결정하는 게 아니다. 피는 기본 조건일 뿐 결국 가족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이 어떻게 앞을 향해 다같이 운명을 지고 나가야 하는지에 따라 좌우된다. 인간의 의지가 결정론決定論을 돌파해낼 수 있는 것이다. 6년간 키웠던 아들인 케이타를 재발견하기까지 료타는 그 사실에 대해 완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가족의 탄생>에 등장하는 남성들이 자기가 가족의 주인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철없고 무책임한 사람들이라는 사실과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자만심의 인간 료타는 류세이의 아버지 유다이(릴리 프랭크)에게 자기가 서로 바뀐 두 아이를 모두 키우겠다는 무례한 말을 서슴지 않고 유다이는 그런 료타에게 꿀밤을 한 대 쥐어박는다. ‘이런 괘씸한 놈’이라는 느낌이 아니라 ‘아, 이런 어리석은 친구 보게!’라는 연민이 담긴 한방이었다. 자칫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는 위기를 부드럽게 풀어내는, 아주 고급스러운 연출이었고 유다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는 장면이었다.

영화 초입부터 한번은 관객을 된통 울리고야 말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절박한 소재의 영화에서 절대 빼먹어서는 안 될 대목이고, 실제로 영화의 승부는 거기서 결정 나기 마련이다. 이제나 저제나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던 순간이 드디어 찾아왔고 히로카즈 감독은 확실하게 관객의 눈물을 뽑아냈다. 얼마나 가슴이 벅차던지 숨이 꽉 막힐 지경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영화를 반추하다가 다시 한 번 울고 말았으니, 이 정도면 영화가 주는 감동을 독자들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료타의 장모로 나오는 키린 키린(<걸어도 걸어도2009>)의 자연스러운 연기도 영화의 품질을 한껏 높여주었다. 그녀는 정말 대단한 실력을 가진 배우다. 케이타 역을 맡은 6살 소년 니노미야 케이타는 의도적으로 연기를 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그 눈동자와 표정에서 절절한 슬픔이 묻어나왔다. 감독은 어디서 그렇게 배역에 딱 맞는 소년을 골랐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일본에서 2주일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그 정도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아마 독립영화 극장들을 통해 장기간 상영될 것이다. 꼭 기억해 두었다가 보시기 바란다. 아기가 뒤바뀐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오히려 가족이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주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