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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파타(나해 연중2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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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연중23주일(이사35:4-7/야고2:1-10, 14-17/마르7:24-37)

 

에파타!

 

마르코 복음서는 다른 3개 복음서와는 달리 아람어 표현이 몇 개 소개되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마르 15:34)입니다. 이 말씀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매년 성금요일 예식 때 가상 칠언(架上七言) 중 하나로 십자가의 깊은 신비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빠”(마르 14:36)라는 말도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공동번역에는 “아버지, 나의 아버지!”라고 번역되었는데, 전 개인적으로 차라리 우리 말 ‘아빠’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봅니다. ‘아빠’라는 아람어는 우리 말 ‘아빠’처럼 자녀와 부모 간에 전적인 신뢰와 애정이 듬뿍 담긴 표현입니다. 이것은 타 종교와 다른 그리스도교 신관이 가진 독특한 특징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느님은 뭔가 두렵고 조심해야 할 분이 아니라 “아빠”라고 부를 정도로 친밀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그 밖에도 “탈리타 쿰”(마르 5:41)이란 말도 있는데, 이것은 “소녀야, 어서 일어나거라”라는 뜻으로 예수께서 죽은 소녀를 소생시켜 주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신약성서는 모두 그리스어로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서는 대부분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로 사용한 히브리어로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지중해 지방의 통용어인 그리스말도 아니고 이스라엘 민족어인 히브리말도 아닌 변두리 갈릴래아에서 통용된 아람어를 굳이 적은 이유는 뭘 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아람어를 사용하신 것도 이유이긴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말들을 했을 당시 상황이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목격했던 사람들의 뇌리에 그 말들이 강하게 각인되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비통하게 절규했다는 충격과 연관되어 있고, “아빠”라는 표현은 “야훼”라는 이름을 감히 입밖에도 내는 것은 불경하다고 믿었던 제자들에게는 엄청난 신앙의 충격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고 “탈리타 쿰”은 이 명령으로 죽었던 소녀가 벌떡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서도 아람어가 등장합니다: “에파타!” “열려라”라는 뜻이라고 성서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귀먹은 반벙어리를 군중 사이에서 불러내어 손가락을 귓속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쉬시고 “에파타”하고 말씀하시자,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목격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에파타’라는 아람말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머리를 꽝하고 때리듯이 또는 번개처럼 번쩍하고 비추듯이 충격적인 사건, 강렬한 깨달음의 순간이 있었나요? 그 체험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혹은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간에 아마도 다들 경험하셨을 겁니다. 우리는 그 순간은 절대 잊을 수가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각자의 인생에 있어서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에파다’사건 외에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그 사건은 띠로(Tyre; 오늘날 레바논에 있는 항구도시)라는 이방인 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방인 여인이 자기 딸의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현대의학으로 볼 때, 아마도 심한 정신질환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매우 퉁명스럽기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을 자녀로, 이방인을 강아지로 빗 대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르 7:27) 이 대목을 들었을 때 여러분의 느낌은 어떠셨나요? 평소 예수님 답지 않은 태도에 좀 놀라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우리를 더 놀라게 한 것은 이방인 여인의 대답입니다: “선생님, 그렇긴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들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마르 7:28) 이 여인이 병든 딸을 고치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심정으로 이런 대답을 했는지 모르나, 어찌 보면 매우 굴욕적이기까지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 속에는 간절한 소망과 믿음이 담겨있습니다. 당시 이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 특별히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이었기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이 강해서 자존심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그녀에게 엄청난 모욕을 주었을 거고, 그래서 그 여인은 그 말을 듣고 물러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은총은 오직 선택받은 자기민족만이 향유해야만 한다는 이기적 신앙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그 여인을 통해서 당신의 제자들과 유대인들에게 메시지를 던지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그리고 해방하는 은총은 당신들의 좁은 생각을 훨씬 넘어서 활동하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에파타’ 즉 ‘열려라’라는 신앙의 커다란 각성, 크나큰 깨달음을 가져다준 충격적 사건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하느님의 영역은 무한해서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은총은 막힘이 없고 모든 시간과 장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에게 두루 미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설정한 온갖 테두리에 갇혀서 그 안에 있는 것만 보고, 듣고, 인정하려고 합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주님은 “에파타”해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당시 유대인처럼, 아니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로 있다면 이처럼 충격적이고 놀라운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딸의 병을 낫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이방인 여인이나 답답함에서 간절히 해방되길 원한 귀머거리 반벙어리가 주님께 다가간 것처럼 할 때, 주님은 닫혀서 힘들어 하는 우리를 풀어주시고, 열어 주셔서 그 속박에서 구출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고 찬양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이 기쁜 소식은 단지 말로만 고백하고 마음으로만 믿는 것에만 그쳐서는 안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야고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 17)

오늘 이 예배를 통해서 주님께 간절히 구하십시오. 그리고 진솔하게 고백하십시오. 내가 평소에 못났다고 업신여겼던 것이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옹졸한 모습이었던 가를, 내가 그동안 생각해 왔던 것들이 얼마나 편협했던 가를, 주님 면전에서 나는 오히려 병들어 힘들어 하고, 온전히 듣지 못하고 제대로 당신의 진리를 말 못하고 있는 귀머거리 반벙어리였음을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나의 마음을, 내 전 존재를 ‘에파타’해 주시기를 간청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그 막힘을 뚫어 주실 것입니다.

이 주일 그리고 다가오는 한 주간에 ‘에파타’로 오시는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 각자와 그 가정과 일터 그리고 주님의 몸 된 이 교회에 임하시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